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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_숲새

시녀는보았다

단오라 하면 신라에서 손꼽는 명절인 것은 저잣거리에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아는 사실이죠. 저도 변방에서 오랫동안 지낸 아가씨가 서라벌에서 처음 맞는 단오가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리미리 준비했답니다. 올해부터 쭉 같이 아가씨를 모신 동료들과 꼭 아가씨를 즐겁게 해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미리 그네 탈 자리도 봐두고, 탈 쓰고 놀 곳도 봐두고, 무엇보다 제일 야심 차게 준비한 것은 목욕이었습니다. 저만 아는 특별한 샘이 있거든요. 매년 몰래 가는 곳이지만 아가씨께 꼭 소개해드리고 싶었답니다. 찬물에 아가씨를 그냥 들어가게 할 순 없으니 물을 데울 솥과 단오에 빠질 수 없는 창포물을 만들 창포꽃을 따다가 모셔놓고 단오만을 기다렸습니다.

 

단오에 제일 먼저 아가씨를 끌고 간 곳은 그네를 뛰는 곳이었습니다. 아가씨는 처음에 그네의 높이에 겁을 먹으셨지만, 곧 익숙해지시더니 곧잘 높이 날아오르셨습니다. 나풀거리던 분홍색 치마가 어찌나 곱던지. 무섭다고 엄살은 좀 부리셨지만 말입니다. 단오라 특별히 챙긴 수리취떡과 앵두도 곧잘 드셨지요. 아가씨께선 식성이 좋으셔서 정말 무슨 음식이든 만드는 보람이 있답니다. 이렇게 건강하신 아가씨께서 지병으로 쓰러지셨다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다 나으셨고 음식도 잘 드셔서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모릅니다.

 

점심이 지나고 나서 소화도 시킬 겸 산에 올라 목욕하기로 했죠. 다들 잘 지나는 곳이지만 잘 찾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명당이라 몰래 가곤 했는데 다 같이 가면 너무 좋을 것 같지 뭡니까. 근처에 다다르니 맑은 계곡물이 흘렀고, 안에 샘은 좁기에 미리 창포물을 우리려고 동료들과 부산스럽게 불을 피우던 중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어디 가셨어요?”
가장 막내인 동료 시녀가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까지는 옆에서 창포물 우리는 것을 구경하고 계시는 것 같더니 모습이 그새 안 보이셨어요.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샘에서 큰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가씨께서 그새 샘에 먼저 들어가셨나 봅니다. 새된 소리에 놀라서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놀라 달려갔습니다. 샘 안에서 넘어지기라도 하셨으면 그 책임을 어떻게 다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놀라서 샘으로 얼른 뛰어갔는데 상상도 못 한 장면을 보고 말았습니다. 목덜미까지 새빨개지신 아가씨 너머로 여덟 화랑께서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요.

가슴을 내밀고 계신 화랑 나으리가 둘, 무덤덤하게 서 계신 화랑 나으리가 하나, 그만 보라며 소리치시는 화랑 나으리가 둘, 돌 쪽으로 몸을 숨긴 화랑 나으리가 둘, 물속에 아예 잠겨버리신 화랑 나으리가 하나,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내의 알몸은 본 적이 없는 저는 비명을 올리고 말았습니다. 옆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지요.

평소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시지 않는 화랑들답게 몸들이 다들 탄탄하시고 물도 맑아 아래가 훤히 비치는데 나으리들께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계시니 보기가 너무 좋았...던 게 아니라 빠르게 이 민망한 상황으로부터 아가씨를 탈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굳어있는 아가씨의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저희가 자리를 뜨자마자 샘에서는 첨벙첨벙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창포물을 데우는 곳까지 아씨를 모시고 왔습니다. 아가씨를 포함한 저희 넷은 활활 타는 불꽃보다도 더 달아오른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한숨을 잠시 쉬었습니다. 만약 그대로 모르고 저 샘에 다같이 들어가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죄송합니다. 아가씨. 화랑 나으리들께서 저기 계실 줄 모르고 제가 모셨네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녜요. 언니가 알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이미 큰일은 다 난 것 같다'는 표정이셨습니다. 아가씨께선 참으로 표정을 못 숨기신다니까요. 지금 바뀐 표정은 앞으로 수련 때마다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 벌써 고민되시는 얼굴입니다

 

잠깐 시간이 지나자 수풀이 부스럭거리더니 손가 막내 아드님께서 튀어나오셨습니다. 얼굴에 싱글싱글 웃음이 잔뜩 걸려 있었습니다.
"낭주낭주,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여덟 남자가 몸을 담갔던 곳이니 단오에 걸맞게 양기가 아주 가득하니 더 좋은 샘이 되었을 겁니다."
"제...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아가씨께선 아무 잘못이 없으십니다!"
"됐어요. 언니 잘못이 아녜요."
아가씨께선 정말 심성이 고우세요. 아랫것을 감싸주시는 모습에 눈물이 조금 고였습니다.

"왜 그런데 모여서 목욕 같은 걸 하는 거예요!
"왕명이 내려왔지 뭡니까. 화랑들이 다 같이 목욕하며, 친목을 도모하라는 참으로 누가 짠 것 같은 왕명이지요. 마치 낭주가 여기 올 것은 아신 것처럼요! 혹시 폐하께 슬쩍 말씀드린 게 낭주셨습니까?"
“진짜 입 안 닥쳐요?”
"왕명에 따라 낭주와도 목욕으로 친목을 다져보면 어떨까 하는데 이 손찬오가 등이라도 밀어드릴..."
"됐으니까 얼른 가버려요!"
 

정말로 화가 나신 건지 열기가 안 가신 건지 모를 얼굴로 화를 내시는 아가씨의 모습을 보며 사예화랑 나으리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십쇼! 하는 메아리와 함께 화랑 나으리는 멀리 사라지셨습니다. 분명 여기 화랑분들이 올 줄은 저도 몰랐는데 왜 자꾸 찔끔하고 가슴이 따가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샘에 가보니 아무도 남아 계시질 않는 걸 보니 다들 그 길로 흩어지신 모양입니다. 참 아쉬운…아니 다행인 일이지요.

그 뒤로 목욕 시중을 어떻게 들어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샘에 들어가긴 했는데 아까 봤던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바람에 혼났답니다. 아가씨께서도 자꾸 집중을 못 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쉬이 잊힐 광경은 아니었던 것이겠지요.

 

그 뒤로 아가씨는 무척이나 가기 싫은 얼굴로 수련에 다시 나가셨습니다. 아무래도 한 주 동안은 그 이야기로 놀림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무용 수업에 갔더니 고개를 바로 못 돌리는 게 수련 부족 문제라고 잔소리를 들으셨다나, 서화 수업에 갔더니 음욕은 마를 부른다는 내용의 구절을 수십번 쓰게 시키셨다거나, 독경에서는 참선은 언제든 올 수 있으나 덕망이 높으신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지 일러 받았다거나, 타금 수업에서는 ‘단오에 자기 머리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처럼 금을 켜보라’는 소리를 듣고 아가씨께서 화랑 나으리 가슴을 때리고 왔다 하시고, 기마 수련에서 가서는 두 분이 서로 한참 눈을 못 쳐다보셨다고 하시고, 정창 수업에서는 ‘골고루 보니까 좋냐?’는 소리를 들으셨다거나, 심지어 가장 덤덤할 것 같았던 검 수업에서도 ‘그대 보기에 어땠나’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시며 한참 하소연하셨습니다. 가장 놀림이 심했던 건 예상대로 사예 수업이었는데 활 하나 쏠 때마다 단오 때 화랑들을 훑던 시선 그대로 과녁에 집중하라는 헛소리를 늘어놓으시는 바람에 점량부 화랑 나으리께서는 또 아가씨께 등짝을 맞으셨다고 하시네요.

 

좋은 단옷날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한동안 저도 화랑 나으리들을 뵈면 얼굴을 못 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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