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세민_감말랭이
“세민아, 오래 기다렸…….”
“그럼 일행 분은 어디…….”
구릿빛 검지가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새봄을 가리키자, 손가락의 주인을 포함하여 도합 네 쌍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새봄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아주 그 잠깐 사이 세민은 모르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세 명의 여성들은 금세 '아차' 싶은 얼굴이 되더니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슬쩍 숙이고 물러났다. 새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며 평소보다 잰걸음으로 세민의 옆에 다가섰다. 그들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보았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들을.
“뭐야?”
“일행 있냐고 묻던데.”
“허! 참나, 그럼 워터파크에 혼자 오는 사람도 있나?”
“혼자 오면 안 되는 곳이냐, 여기?”
이걸 질문이라고? 가슴 속 피어오른 불씨에 기름 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핀잔은 순진한 눈빛 앞에 쏙 들어갔다. 파라솔 테이블에 앉아 새봄을 올려다보는 세민이 순진해 보인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빈말로라도 순한 인상이라고 할 수 없는 남자였지만, 삐쭉 올라간 눈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꼬인 데 없이 솔직한 호기심을 띠고 있었으므로 새봄은 애써 혼자 속을 삭였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친구나, 가족이나, 연인끼리 오지.”
“그러네.”
새봄은 일부러 은근히 '연인'에 힘주어 말했지만 무성의하게 주변을 슥 둘러 본 세민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 어쩐지 얄미워 그녀가 트집을 잡았다.
“주변을 좀 봐봐, 최세민. 혼자 온 사람 있나.”
“…너 보기도 바쁜데.”
그렇지만 아무래도, 저런 낯부끄러운 소리를 툭 뱉어 놓고선, 스스로 부끄러워져 결국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벌게진 얼굴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애인에게는, 무방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창처럼 훅 들어오는 간지러운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새봄 역시 마찬가지로 뺨을 붉혔다. 덕분에 괜한 투정을 부릴 수 있는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간지러움과 민망함, 그리고 아직 해소되지 않은 질투가 한 데 섞여 부글거리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새봄이 별 얘기를 다 한다고 한발 늦게 소리를 빽 질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질투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칠팔월 불볕더위를 생각하면 아직 본격적인 물놀이 시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여름의 날씨에 새봄과 세민이 워터파크에 오게 된 것은 서라벌에서의 추억 아닌 추억 때문이었다.
핸드폰 캘린더를 넘겨보던 새봄이 어, 이날 단오네, 하고 무심코 뱉은 것이 계기였다. 천 사백 년 전 아찔했던 그날의 해프닝이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세민은 돌이켜보니 조금 불쾌해졌고, 새봄이 깊게 팬 그의 미간을 자연스럽게 쓱쓱 펴주며 물놀이로 화제를 전환했다. 계곡, 강, 바다를 차례로 나열하다 보니 이야기는 자연스레 워터파크까지 이어졌다.
앞선 세 곳이야 세민도 모를 리 없지만 워터파크는 아직 현대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 생경한 장소였다. 새봄은 나름대로 그 풍경을 설명하다가 문득 자신도 가본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세민은 가본 적 없는 곳이니 좋은 경험도 되겠다, 단오에서 연상되는 눈치 보이는 기억을 뒤덮을 새로운 추억도 만들면 좋겠다 싶어 그렇게 워터파크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럴 줄 알았다면 오자고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새봄은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지금이야 남모의 마법 같은 기적으로 어엿한 현대 사람이지만 세민은 본래 신라인이었다. 그것도 보통 신라인이 아닌 '국가 공인 엘리트 남성 집단' 출신이 아니던가. 심지어 이름에는 무려 꽃 화(花)자도 들어갔다. 현대적으로 재해석 된 화랑 콘텐츠를 보면서 세민은 이따금 조금 오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새봄이 자신의 기억을 돌이켜 보건대, 화랑을 뽑는 기준에는 문무양도만큼이나 외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던 것이 분명했다는 소리다.
당시에는 본인 입으로 서라벌 최고 미남이라 주장하는 이와 누가 봐도 화려하게 생긴 미남 등이 있어 세민이 미처 끼어들 틈은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그가 어디 가서 외모로 빠지는 편은 아니었다. 새봄은 평소에도 가끔 세민을 돌아보는 시선들을 알고 있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세민에 대한 신뢰가 가장 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옷을 벗고 다니는 수영장에서는 사정이 조금, 아니,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는 미처 몰랐다.
‘여기는 옷 갈아입을 때 특이한 문화 같은 거라도 있냐?’
’응? 특이한 문화?’
‘어. 자꾸 쳐다보던데.’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 좀 불안했다, 탈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세민이 약간의 걱정을 섞어 한 말에 설마설마하긴 했지만 워터파크로 들어서자마자 화살처럼 꽂히는 시선들을 느끼고 새봄은 확신했다. 연병장 창고에서 우르르 쓰러지던 장들을 맨몸으로 받아낸 일도 그렇고, 화랑들 중에서도 제일 몸이 단단해 보이더니 현대에 와서는 그 위용이 더욱 부각됐던 것이다.
슬라이드 줄에 서 있는 지금만 해도 새봄은 앞 사람과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다. 사실 쳐다보는 것 정도야, 솔직히 말해서, 가진 이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었다. 매일 보는 자신도 질리지 않는데 처음 보는 이들은 얼마나 눈을 뗄 수 없겠느냐고 쿨하게 넘겨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새봄이 자리만 비우면 어디선가 나타나 세민에게 치근덕대는 사람들을 몇 번 겪고 나니 이런 시선조차 곱게 넘길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런 애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보다 들떠 보이는 세민은 슬라이드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새봄은 소리 없는 전투를 홀로 치러내야 한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
“뭐가?”
“…워터파크 와서 좋냐고.”
유치한 소리를 하려다 새봄은 세민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대신 그녀는 슬쩍 그의 허리에 손을 두르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렇게 갑자기 붙어와도 자연스럽게 어깨를 끌어안아 주는 것이면 됐다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 * *
공방전에 신경이 쏠려있던 새봄이 결국 핸드폰을 분실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방수 케이스에 넣어 목에 걸고 다니던 것을 잃어버릴 정도였으니 그녀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두고 온 곳을 금방 떠올린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같이 가.”
“아냐, 됐어. 그럼 음식은 누가 지켜?”
테이블에 놓인 햄버거 세트를 돌아보며 그녀가 따라오겠다는 세민을 도리어 말렸다. 사실 그사이 또 어떤 습격이 있을지 몰라 두려웠지만 그만큼 빨리 다녀오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봄이 떠나자 세민에게 기다렸단 듯 어슬렁거리며 붙어오는 무리가 나타났다. 불쑥 다가가 자연스럽게 착석하려던 시도는 비록 세민의 기민함으로 실패했지만, 그 정도로 기죽어 돌아갈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그에게 말을 걸 깜냥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민의 눈초리가 제법 험상궂어졌지만 그들은 잠시 주춤하기만 했을 뿐 여전히 능글거리며 접근해왔다.
“이야, 이 형님, 몸매가 아주 그냥!”
“운동하시는 분인가? 몇 살?”
손찬오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형님은 무슨… 오늘 그에게 말을 건 이들 중 단연코 가장 무례했기에 세민은 얼굴만 찌푸릴 뿐 별다른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능숙하게 넘긴 남자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아까부터 저기서 봤거든요? 와 근데 진짜, 멀리서 봐도 장난 아니더라고. 쇠질 하루 이틀 한다고 나오는 몸이 아니거든 이게.”
개중에서도 가장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옆을 꿰찬 남자가 세민의 팔을 쿡 찔렀다. 이번에도 세민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눈빛이 조금 더 형형해졌다. 이들이 조금 덜 뻔뻔했거나, 조금 더 눈치가 있었더라면 이쯤 물러갔을 터였다.
“일행은 아까 옆에 있던 그 여자가 다예요?”
“…예.”
“여친?”
여친, 그러니까 여자친구. 아직 여친이라는 말이 익숙지 않은 세민이 질문을 한 번 더 곱씹었다. 그 찰나의 정적을 오해한 남자가 실실 웃었다.
“아아, 미안 미안. 여친은 아니고 썸녀?”
썸녀는 또 뭔지,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지만 세민은 궁금하지도 않았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시정잡배들과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다짜고짜 나타나서 친한 척을 하고 찔러대는 것도 불쾌했지만 새봄더러 그 여자라 하지 않나, 관계를 캐묻지 않나, 여하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런 놈들을 새봄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은 까닭이다.
서라벌이었더라면 이런 조무래기들은 일갈 한 번으로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서라벌에 비해 꽤 성가실 정도로 섬세한 사회였다. 자신의 다혈질을 걱정하던 새봄의 얼굴을 떠올리며 세민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들을 정중하게 내쫓겠다 마음먹었다. 이건 절대 저놈들이 좋아서 잘 대해주는 것이 아니다. 다 유새봄이 걱정하니까… 세민이 조용히 이를 갈고 있는 사이 남자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양아치 같은 웃음을 비실비실 짓고 있었다.
“썸녀면 아직 괜찮지? 딴 게 아니고, 우리가 딱 형님만 있으면 여자들…….”
“저기요!!”
별안간 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곧 노한 발걸음의 새봄이 불쑥 끼어들었다. 굳게 다문 입과 찌푸려진 미간으로 명백한 불쾌함이 드러났다.
한달음에 달려 온 그녀가 세민의 팔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물론 그런다고 그가 끌려올 리는 만무했지만 어쨌든 새봄이 노린 것은 방어를 암시하는 효과였으므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세민뿐만 아니라 껄렁거리던 남자들의 이목까지 전부 새봄에게 집중되었다.
“이 사람 여친 있거든요?”
“아… 뭐야. 여친 맞았네.”
“네네, 제가 여친 맞고요. 남친 자리 같은 거 따로 안 필요하니까 그냥 가세요.”
“뭐? 뭐라는 거야.”
“야, 그냥 가자.”
별 또라이를 다 보겠다는 얼굴로 돌아선 남자들은 생각보다 시시하게 사라졌다.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어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새봄을 보며 세민이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되짚었다. 남친 자리 안 필요하니까 그냥 가세요?
“무슨 소리야?”
“뭐?”
“남친 자리 같은 거 안 필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니까, 남친 필요 없다고.”
“누가?”
“누구긴 누구야, 너지!”
그는 새봄이 당최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 자신에게 남친, 남자친구, 즉 남자 정인이 필요 없는 건 여러모로 당연한데 왜 새봄은 이렇게 열을 내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리둥절한 세민을 두고 새봄은 결국 종일 쌓였던 분통을 터트렸다.
“와,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젠 하다 하다 남자까지 꼬여? 여자들만 쳐내기도 바쁜데, 왜 내가 남자들까지 견제해야 해? 이럴 줄 알았으면 오자고 안 했어! 인간들이, 놀러 왔으면 놀기나 할 것이지 왜 남의 남자한테 눈독 들이고 있는 건대?”
“…잠깐만. 진정해 봐.”
“진정이 되게 생겼어 지금? 말 나온 김에, 너도 그래 최세민! 너도 잘한 거 없다고! 대체 몸이 왜 그렇게 좋아? 어? 차라리 래시가드라도 입던가, 아니면 구명조끼라도 입던가, 왜 그렇게 훌렁훌렁 벗고 다녀서 온 수영장 사람들 다 꼬시고 있느냔 말이야!!”
“야, 좀!”
다급한 마음이 앞선 세민이 벌떡 일어나 커다란 손으로 새봄의 입을 덮어버렸다. 그렇지만 이미 주변에서 힐끗대기 시작한 시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새봄은 손바닥 아래에서 무어라 소리쳤지만 꽉 막힌 탓에 의미 없는 웅얼거림만 새어 나왔다. 그녀가 세민의 팔뚝을 퍽퍽 치는 동안 그는 새봄을 앉히고 급한 대로 눈에 띄는 햄버거를 입에 물렸다. 재갈 대신 햄버거를 입에 문 채 새봄이 도끼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참나,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
“아까 그놈들 남친이니 뭐니 그런 소리 안 했어.”
일단 입에 들어 온 햄버거를 우물거리던 새봄의 표정이 바뀌었다. 분노에서 회의로. 엄한 사람 잡고 있으면서도 또 음식물은 착실하게 목 뒤로 넘기는 모습에 세민은 어이가 없어졌다.
“뭔데 그럼? 너한테 왜 왔는데?”
“몰라. 갑자기 와서는 너 여친 맞냐고 물어보고, 또 뭐라더라… 썸녀? 썸녀면 아직 괜찮지 않냐, 뭐 그런 소리 하던데 제대로 듣지도 않았어.”
“뭐? 맞잖아, 그럼! 나 여친인지 떠보고 아니면 너한테 수작 부리려고!”
“애초에 그런 의도였대도 내가 넘어가겠냐?”
“아니, 그렇게 따지면 그건 아니지만…….”
그제야 일말의 이성을 되찾은 새봄이 말끝을 흐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양새에 헛웃음이 나면서도 내심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자신은 분명 제정신은 아니라고, 세민이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녀 하나만 믿고 천 사백 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순간부터 이미 제정신은 아니었다.
후회는 없었다. 신분도, 가족도, 친우도, 삶을 이루던 모든 것들을 갈아 치워야 했지만 본디 '그곳' 사람이 아니었던 이와의 인연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선택권은 없다 싶은 정도로 자명했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초행길이라고 해도, 길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새봄이 준정의 몸으로 뒤바뀌었던 그때, 목숨줄처럼 붙잡고 있었던 뻣뻣하고 차가운 손의 촉감을 생각하면 세민은 아직도 아찔했다. 갑자기 생겨난 팔뚝의 상흔을 보며 툭 꺼지던 발밑을, 불을 삼키기라도 한 양 바짝 타던 속을, 차라리 창검에 찔리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감정을, 잊을 수도 없거니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다. 눈앞의 길을 따라가는 방법만 알았던 그가 처음으로 길 자체가 없어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았던 그 때의 경험은 도리어 세민으로 하여금 후일의 결단을 쉽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새봄은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도 당사자는 이 맹목적인 마음을 모르니 답답할 지경이다. 말로 풀어낼 자신은 없었고 더욱이 꺼내 보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러니까 혹여 부서질까 두렵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꽉 껴안거나, 틈만 나면 입을 맞춘다거나, 어떻게든 이 마음이 닿길 바라며 바라보는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그가 남사스러운 고민을 하는 동안 우물쭈물하던 새봄이 마침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질투 나는 걸 어떡해?”
“…….”
“네가 한눈팔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냥 싫단 말이야. 남들이 너한테 그런 식으로 관심 갖는 거. 아, 진짜 한심해 보이는 거 아는데…….”
“한심하긴 누가?”
“어?”
“한심하긴 누가 한심해.”
그렇지만 아무래도, 저렇게 얼굴을 붉히며 소심한 질투를 보여 놓고, 스스로 한심하다며 자책하는 애인에게는, 도리어 자신이 독점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그스름한 귀를 만지작거리며 새봄이 ‘그럼 됐고…….’하며 웅얼거렸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속은 시원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세민 때문에 더 민망해지고 있었다. 이 정도 질투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지.
노골적인 시선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먼저 눈을 피했다. 그러나 새봄이 조금만 더 들여보았더라면 금세 그 속에 들끓는 열기를 읽어냈을 것이다.
“집 가자.”
“뭐? 벌써? 설마 내가 그런 말 해서 가자는 건 아니지?”
“…맞긴 한데 네가 생각하는 이유 때문은 아닐걸.”
“무슨 소리야? 아니, 모처럼 새로운 경험 하는데 벌써 가면 아깝잖아. 나도 이제 진짜 신경 안 쓸 테니까 좀 더 놀다 가.”
“넌 꼭 이걸 말로 해야 아냐?”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의 새봄을 내려다보며 세민이 깊은 한숨을 뱉었다. 파인 미간과 굳은 입매는 얼핏 화난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히도 노련한 새봄은 할 말을 고르느라 나온 표정인 것을 알아차렸다. 대체 무슨 말이길래 저렇게 주저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 세민이 그녀의 옆에 털썩 앉더니 별안간 손을 잡아 왔다. 곧이어 그가 조금 전의 새봄만큼이나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못 참겠다고.”
“…….”
“에이씨, 사람 민망하게…….”
대체… 어디서? 왜? 뭐 때문에? 새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순식간에 차오른 열기로 인해 밀려나고 말았다. 머릿속으로도 모자랐는지 열기는 기세 좋게 스며 나와 뺨과 귀, 목까지 홧홧한 기운으로 물들였다. 맞잡은 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축축했다. 물기는 마른 지 오래인데도.
워터파크를 일찍 나선 덕분에 세민과 새봄은 저녁으로 쑥떡과 제철 과일을 챙겨 먹으며 꽤 그럴듯한 단오를 마무리했다. 비록 체력이 바닥난 새봄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다며 드러누운 덕에 세민이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했지만, 아무튼 그것은 전부 물놀이의 후유증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