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_레몽찌
※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게임 내의 스토리(설 루트 및 그대 엔딩의 배경을 바탕으로 한 창작 글입니다)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해주세요.
네 잎 클로버
w.레몽찌
“찾았다-!”
어느 대학병원 정문 주변의 너른 화단 안에서, 새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하늘을 향해 오른팔을 쭉 뻗고선, 손에 쥔 잎사귀를 자랑스레 바라봅니다. 자그마한 손안에는 잎사귀가 네 장이나 달린 토끼풀이 있습니다. 새봄이는 어쩐지 손안의 행운이 자랑스러워, 허공에다 그것을 마구 흔들어 보입니다. 신이 난 모양인지, 곧이어 화단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녔죠.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사실, 새봄이가 행운의 클로버를 찾아 헤맨 지도 어느덧 한 시간가량이 지나 있었답니다. 클로버를 찾는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만큼의 시간을 체감하지 못한 모양이지만요. 어쨌든 새봄이에게는 그만큼의 기쁨과 보람이 자리했습니다. 한 시간을 소비해 찾아낸 행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이 무척이나 들뜨고 만 거지요.
“설아! 여기 봐봐, 나 네 잎 클로버 찾았어!”
“…….”
“이거 봐, 새봄이가 찾았다니까!”
새봄이는 옆에 옴츠려 앉아 있는 설이의 어깨를 톡톡 건드려, 그 눈앞에 네 잎 클로버를 불쑥 들이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새봄이의 기대와는 달리, 설이의 표정이 뾰로통하게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설아, 왜 그래?”
“…….”
“기분이 안 좋아?”
“그런 거 아냐.”
“……아닌 것 같은데?”
새봄이가 설이의 볼을 콕, 찌르며 물었습니다.
“찌르지 마!”
갑작스러운 손길에 화들짝 놀라 찔린 볼을 가리면서, 설이는 새봄이를 노려봤습니다. 날카롭게 받아치는 설이의 반응에 새봄이는 잠시 얼어붙고 말았지만,
“설아.”
이내 아랑곳없이 설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대로 네 잎 클로버가 안 나올까 봐 걱정돼?”
“…….”
설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침묵으로 걱정된다는 의사를 어필할 뿐이었죠. 그리고 그 의사는 새봄이에게 제법 올바르게 전달되었습니다.
“걱정 마, 좀 더 찾아보면 금방 나올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새봄이가 방금 찾았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네 잎 클로버를 찾아내었다는 구실을 통해 다음 네 잎 클로버도 마찬가지로 금방 찾아낼 수 있다는 단순한 결론에 이르는 걸까요. 설이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설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새봄이가 많이 도와줄게!”
새봄이는 많다, 는 표현을 있는 힘껏 표현하기 위해, 양팔을 허공으로 휘휘 휘두르는 행동을 취하며 토라진 설이의 심정을 달래봅니다.
“……응, 고마워…….”
설이는 어쩐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새봄이에게 감사의 말마디를 건네었습니다. 새봄이는 그 자그마한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은 모양이고요. 그래서 새봄이는 설이의 손을 냉큼 잡아끌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당황했지만, 설이는 그대로 새봄이에게 얌전히 끌려갔어요. 두 어린이는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있는 토끼풀 무더기로 향했습니다.
설이는 새봄이의 말과 행동이 모조리 의뭉스러웠지만, 묘하게 확신에 차오르는 말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봄이에게 이성을 맡겨보기로 하였죠. 네 잎 클로버가 나올지 안 나올지는 우선, 좀 더 가서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요.
그리고 환자복 차림의 가녀린 여성이, 네 잎 클로버 탐사를 떠나는 두 어린이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이화는 어느 대학병원의 정문 근처에 서 있습니다. 어깨에는 분홍색 카디건을 걸치고, 환자복의 차림을 한 채로요. 근처 화단에서 노닥거리는 아이들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이들을 지켜봄과 함께 이화는, 자신의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원 안으로 줄줄이 도착하는 택시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죠. 이화는 화단 가에 있는 어린이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병원 안으로 도착하는 택시 몇 대를 흘긋흘긋 바라보다, 다시 화단 가의 어린이들을 지켜보길 반복했습니다.
“언니-!”
그러다 택시에서 내리는 언니를 발견합니다. 이화는 용화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건넵니다. 이화를 발견한 용화는 자신을 불러세우는 이화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다란 연보라의 머리칼을 하나로 깔끔하게 묶어, 하얀 블라우스에 연보라색의 오피스 스커트 차림을 하고, 흘러내린 각진 무테의 안경을 무심하게 올리면서요.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온다는 연락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제부 바빠서 못 온다며.”
“언니도 바쁘면서.”
“오늘은 한가해.”
라며 건네는 어투가 능청스러운 것에 비해, 그와 함께 건네는 표정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용화가 거짓을 말할 때면 왼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는 버릇이 있거든요. 사실 어지간해선 눈치채지 못하는 버릇이지만, 그 미묘한 버릇을 오늘은 눈앞의 동생이 온전히 포착하고 말았습니다. 분명 거짓을 건넬 때마다 드러나는 용화의 ‘티 나지 않는’ 버릇입니다.
“거짓말.”
“거짓말 아냐. 그리고 모처럼의 퇴원인데 널 어떻게 혼자 두니. 나라도 서둘러 와야지.”
반차까지 써가면서 급하게 온 거 다 알아. 이화는 그 부자연스러운 표정에 약간의 반박을 곁들이고 싶었지만, 한사코 바쁘지 않다 주장할 용화의 말대답이 자연스레 예상된 탓에 거들려던 말마디를 그만두었습니다.
“언니.”
“왜.”
“그거 알아?”
이화가 갑자기 용화의 손을 잡아당깁니다. 잡은 손을 아래편으로 끌어당기더니, 곧바로 용화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가 무릎을 조금 굽혀보라는 손짓을 건넵니다. 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용화는 이화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습니다. 그러자 이화가 곧바로 언니의 귓가에 양손을 가져다 댑니다.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말을 잇다가,
“언니는…….”
잠깐 뜸을 들이나 싶더니,
“……날 너무 좋아해.”
이내 용화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닥입니다. 뜬금없는 속삭임에 용화는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이화를 바라봅니다. 이화는 그 시선을 마주 보다, 쿡쿡 웃으며 용화를 등지고 섰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멋쩍은 잘난 체인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도 맞는 말을 한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퇴원 날을 핑계로 서슴없이 동생에게로 달려와 주는 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쨌든 이화에게로 선뜻 달려온 용화의 행동이 이화의 기분을 의기양양하게 만든 데에 한몫한 셈입니다.
이화는 새침한 말마디를 내뱉고선, 어깨에 걸친 카디건을 새침하게 고쳐 입었습니다. 말이 없는 언니가 신경 쓰여 흘긋, 옆눈질까지 하면서 말이죠. 어련하시겠어요, 요 여우 같은 기지배. 말은 없었지만 이미 용화의 표정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조리 이화가 상상한 용화의 속내에 불과했지만 말이에요). 용화의 표정이 어떤 저의를 품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썩 달가운 것이 아님에는 확실했습니다. 이화는 모른 척, 정문 근처의 화단 곁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살아온 자매이니만큼 달갑지 않다, 는 기운을 파악할 정도의 눈치는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용화는 그런 이화의 심정을 모두 파악했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싫어하진 않지.”
“……대답이 뭐 그래? 그냥 내가 좋다고 해.”
그리고,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대답이 너무 어정쩡해. 영 맘에 안 들어. 이화는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이만하면 언니치고는 후한 대답입니다. 이화는 그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못마땅한 기분은 못마땅한 것이고, 그렇다면 상대에게 못마땅한 기분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언니가 좋아하는 논리적인 사유는 아니었지만요.
이화로부터 당돌하면서도 보로통한 반응이 돌아왔지만, 용화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이화답다면 참으로 이화다운 반응이었으니까요. 이런 식의 당돌한 반응은 어쩜 어릴 때부터 변함없이 한결같은지. 멋쩍은 반응을 받길 기다린 건 분명 이화 자신이었을 거면서, 되려 스스로 온몸으로 멋쩍다는 반응을 내비치니 조금은 기가 막힙니다. 멋쩍어하는 태도를 보이는 동생이 새삼스레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말이죠.
핀트가 살짝 엇나간 동생의 태도를 어떻게 되돌릴까, 잠시 고민한 용화는, 재빠르게 말문을 열어 분위기를 환기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부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못 온다니.”
“남편이야 뭐…….”
“또 일이 바쁘대?”
이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곧바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이야 항상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말마디에는 힘이 빠져있었죠. 힘 빠진 이화의 말마디는 용화의 차분한 심기를 자극하고 말았습니다.
“……그놈의 일 핑계는 과로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우려먹을 셈이라니?”
용화는 이화의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에도 없는 제부에게 따졌습니다. 그것도 평소와는 다르게 격정적입니다.
그러나 용화의 입장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는 분노였습니다. 좀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 제 가족을 살뜰히 보살피지도 않는 제부였으니까요. 아무래도 제부를 향한 분노는, 상시 제부에게 품고 있던 못마땅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탓이 컸습니다.
용화는 제부에게 치미는 분노를 굳이 억누르지 않으며 비난을 덧붙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랜 기간 입원해서 짐이 한가득한데, 어떻게 아내의 소지품 하나 제대로 챙기러 올 생각조차 없을 수 있냐며 화도 내면서요.
“어지간해선 흥분하지도 않는 사람이 웬일로 흥분을 다 하네.”
언니가 화를 내는 일은 참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화는 그 모습을 말끄러미 지켜보다, 용화의 손을 살그머니 그러잡았습니다. 또한 무척이나 뜻밖의 말마디로 용화를 차분히 진정시켰죠.
“……이런 일로 어지간히 흥분해오던 너는 웬일로 차분하다니.”
조금 멋쩍은 모양인지, 용화는 이화가 그러쥔 손길을 슬쩍 벗어나 비스듬히 팔짱을 낍니다. 그렇게 팔짱을 낀 채로 이화의 물음을 되받아치니, 이화는 용화의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살그머니 말아 올립니다.
“한결같이 고질적인 변명이 이젠 우습지도 않아서 그래.”
이내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차분하게 뱉어내는 동생의 힘없는 구실에, 용화는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습니다. 용화는 눈앞의 동생이 정말 자신이 알던 동생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찬찬히 살펴보기까지 했죠 (거짓을 조금 보태자면 그랬습니다). 남편이 자기 대신 일과 사랑에 빠진 것만 같다며, 울며불며 하소연하던 그 동생이 맞는 건지. 그렇게 하소연하던 일도 분명 엊그제인 것 같은데요. 어느 사이 말쑥하게 철이 들어버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철이 드는 건 원치 않았지만 말이에요.
아무튼 예전과는 다른 동생의 차분함이 용화에게는 조금 처량하게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못한 제부의 이미지는 한층 악화해버렸고요. 자리에도 없는 제부를 아니꼬워할 수밖에 없는 사유는 더 늘고 말았습니다.
“그이가 무관심한 건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와줄 거란 기대도 안 했으니까. 퇴원 수속이야 혼자서도 할 수 있고…….”
톡, 톡. 이화는 발끝을 세워 애꿎은 신코를 괴롭혔습니다.
"병실에 틀어박혀 지내기만 해서 뭘 더 해달라 보챌 입장도 아니니……, 내가 이해해야지."
용화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마디를 꺼내나 싶더니, 이내 온전한 문장을 입 밖으로 뱉어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화를 바라보는 용화의 시선은 상당히 날카로웠죠. 이화는 용화의 시선을 의식하며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하여간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언니도 대단하다. 참 한결같이 미워하네.”
“없는 장점을 만들어 낼 수도 없으니 그러지.”
“푸흡.”
언니의 거침없는 말대꾸가 새삼스럽게 우스워, 이화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습니다. 왜, 그래도 얼굴은 좀 잘생긴 편 아냐? 능청스럽게 농담도 흘리면서요. 평소 주위 사람에게는 냉정하면서도 이성적인 모습만 보이면서, 언니는, 제부 이야기를 꺼낼 때면 언제나 감정적으로 극성인 모습을 보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언니가 이렇게까지 극성맞은 성격이란 것도 잘 모를 겁니다.
어쨌든 굳이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화는 그런 언니가 좋았습니다. 동생이 속상해하면 평소의 성격은 모조리 집어던지고 함께 공감해주는 언니가요. 그런 동생의 속생각을 알지 못하는 용화는, 그 뜬금없는 웃음이 당황스러워 곁의 동생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말았지만요.
“뭐어……, 돈이라도 많이 벌어오니까.”
덕분에 병원 생활도 무사히 마치고. 이화는 혼잣말을 흘렸습니다. 용화의 팔을 그러안아, 팔짱을 끼는 행동을 취하면서요. 얘가 정말이지 말이나 못 하면. 이번에도 말은 없었지만, 용화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런 식으로 말을 건네는 것 같았습니다.
“허구한 날에 일 핑계만 대는 사람을 넌 뭐가 좋다고…….”
“그러게, 대체 무슨 대단한 콩깍지가 씌어서 결혼까지 한 건지.”
이화의 대답은 비교적 묵직했습니다. 어딘가 묵직한 고민이 섞인 것도 같았고요. 그런 이화의 답변이 또다시 용화의 말문을 막히게 했습니다.
“미안해 언니.”
그리고 갑작스러운 고백과 같은 사과의 말마디에 한결 더 놀라고 말았죠. 언제나 제 편인 언니가 있어 든든하기만 하다면서, 용화의 팔에 엉겨 붙어 애교를 부리며 어물쩍 넘어가기에 급급하던 동생이었으니까요.
“다 큰 동생이 허구한 날에……, 언니 속이나 맨날 썩이고.”
이화는 아래편으로 손을 펼치더니 자기 손을 말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손가락의 곳곳에는 반창고가 가득합니다. 용화도 이화가 펼친 손을 바라봤습니다. 한 번 상처가 생기면 잘 아물지 않는 피부가 어쩔 땐 원망스럽기까지 하다며 울먹이던 동생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그해 겨울엔 손을 보호할 수 있도록, 더한 상처가 생기지 말라며 예쁜 장갑 한 쌍을 사주었죠. 상처의 흔적들은 여전했지만 말이에요.
용화는 시선을 이화의 얼굴 근처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또다시 말이 없어진 언니를 의식한 이화는, 고개를 돌려 용화의 시선을 마주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용화가 이화의 볼을 꼬집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컸어?”
“아, 아파-. 그만해.”
물론 아프지 않을 정도로요.
“엄살 부리는 것도 어릴 때 그대론데.”
“이거 봐, 또 애 취급이네.”
“애를 애 취급하지 그럼.”
애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는 모습부터가 한참 덜 자랐다는 증거야. 아직 한참인 거 같으니 좀 더 열심히 자라도록 해. 그렇게 말하며 용화는, 이화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용화가 장난 섞인 말마디를 나직하게 말하니, 이화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언니를 노려봅니다. 헝클어진 앞머리를 매만져 수습하면서요.
“애를 낳은 지가 언젠데 여태 그런 소리야. 다 컸다니까?”
“다 큰 거 치곤 애기 때 얼굴이 너무 그대로야.”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화는 또다시 뾰로통하게 토라지는 행색을 취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건지, 다급히 용화의 시선을 맞추며 이야기합니다.
“근데 나, 언니 말대로 내가 왜 결혼한 건지 많이 생각해봤다?”
고개를 홱 돌려 정문 근처 화단을 바라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그거밖에 없어.”
다시 언니의 시선을 마주칩니다. 무슨 결론인데. 용화는 그에 응하는 눈짓으로 말없이 이화에게 물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예쁜 아들 만나려고.”
“싱겁긴…….”
누가 아들 바보 아니랄까 봐. 용화가 흘리는 혼잣말에 이화는 미소 지었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화단 가를 바라봅니다. 용화도 이화의 시선을 따라 맞은편의 화단을 바라봤습니다. 시선의 끝에는 화단 안에 쭈그려 앉은 두 명의 어린이가 자리했죠.
“뭘 저렇게 열심히 찾고 계시다니.”
“네 잎 클로버.”
말을 듣고 보니 화단 안에는 토끼풀의 군락이 한가득했습니다. 그나저나 네 잎 클로버라. 용화는 네 잎 클로버를 열심히 찾는 두 어린이를 바라보며 비교적 뜬금없이 예전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토끼풀을 정성스레 팔찌로 엮어, 그것을 자신에게 선물하던 어릴 적의 이화를요.
“유치원 친구가 네 잎 클로버 자랑을 그렇게 했대. 그게 어지간히 부러웠나 봐.”
“엄청 열심히 찾네.”
“내 말이. 오늘 안에 못 찾으면 집에 돌아가지도 않겠다고 선언까지 하셨어.”
에휴, 저 똥고집 대체 누굴 닮은 거야. 이화는 푸념 섞인 한숨을 흘렸습니다. 그런 이화를 바라보며 용화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게. 저 쓸데없는 옹고집, 어디 사는 누구를 쏙 빼닮으셨네.”
푸하하, 이화는 용화의 말마디에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더니,
“그럼, 누구 아들인데.”
곧바로 의기양양한 기세로 용화를 향해 대답합니다. 아들의 성격이 까다롭다며 약간의 못마땅한 기색을 비치다가도, 그 점이 쏙 자신을 빼닮았다고 이야기하면 한결같이 기분을 누그러뜨립니다.
“올해 몇 살이니.”
“일곱 살.”
“벌써?”
“응.”
“세상에……. 내년이면 입학하는구나.”
“나 내년엔 초등생 학부모야 언니.”
맙소사, 설이의 나이를 들은 용화는 예상치 못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거기다 내년이면 제 동생이 학부모까지 된다고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이 개탄스럽게까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많이 컸지?”
“정말 눈 깜짝할 사이네.”
“그러고 보면 작년 언니 생일 이후로 같이 만난 적도 없으니까, 언니한텐 더 빠르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세월이 야속하단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야. 용화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런 용화의 말을 들은 이화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건 모조리 변명에 지나지 않고, 부족하면 만들어서라도 써야 한다는 말버릇을 늘상 달고 다니는 언니로부터, 세월이 야속하단 하소연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지나간 세월에 대한 한탄을 언니 입으로 직접 듣게 될 일은 평생 없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정작 한탄을 뱉은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요.
“근데 정말 많이 컸다. 처음 등원할 때만 해도 온종일 네 걱정만 시키더니, 이젠 다른 애랑 재밌게 어울려 놀 줄도 알고.”
설이가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모습이 너무 선해서, 혼자 떼어놓기 불안해 죽겠다며 네가 전화 너머로 울먹이며 하소연하던 것도 불과 엊그제인 것 같은데, 그것도 벌써 몇 해 전의 일이구나. 용화는 설이의 첫 등원 당시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언니가 생각해도 그렇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친구도 알아서 데려왔다니까.”
용화는 다시 화단 가의 어린이들을 바라봅니다. 정확히 말하면, 클로버로 엮은 팔찌를 설이의 손목에 매달고 있는, 화단 가의 어떤 여자아이를요.
“안 그래도 묻고 싶었는데, 옆엔 설이 친구니?”
“응, 유치원 친구.”
애기 너무 예쁘지? 이름도 새봄이라더라. 부모님이 누구신지 이름도 애기랑 어울리게 잘 지으셨어. 이화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습니다.
“그새 친구가 생겼어?”
“아무렴, 유치원 보낸 지가 몇 년인데 친구 하나 정돈 있어야지.”
그래,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네. 용화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이화의 대답에 수긍했습니다.
“원내에서도 둘이서만 꼭 붙어 다닌대. 오늘은 네 잎 클로버 찾는 거 도와준다면서 같이 왔더라고.”
나 없으면 종일 울기만 하던 애기가 언제부터 혼자서 씩씩하게 다니기 시작한 건지. 오히려 외동인 애들이 혼자 알아서 척척 해내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아? 그 몇 년 사이에 저렇게 예쁜 친구도 사귀고. 우리 아들 벌써 다 키운 것 같아. 이화는 한탄하듯이 말했습니다.
“섭섭해?”
“아니.”
“섭섭한 눈친데.”
“……정말, 언니한테 그런 식으로 추궁받으니 아니라고도 못 하겠네.”
설이가 무언가를 하나씩 혼자서 해낼 때마다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긴 해. 엄마인 내 역할도 점점 필요 없어지는 기분도 들고. 이런 기분에 얼른 익숙해져야 할 텐데……, 여전히 미숙한 것 같아. 이화는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습니다. 자못 쓸쓸하게, 설이가 있는 화단을 바라보면서 말이죠. 용화는 그런 이화를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이화 너…….”
화단 너머로 쓸쓸한 시선을 건네는 이화가 안쓰러워, 용화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할 말을 세심하게 골랐습니다.
“……보호자께 연락은 드렸니?”
세심하게 고른 말이 조금은 엉뚱했지만 말이죠. 그런 언니의 질문에 이화는, 고개를 돌려 언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이내 잠시 생각에 잠기듯 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죠.
“당연하지, 아가 걱정하실 텐데.”
“보호자로서의 서툰 면모는 졸업한 모양이네.”
빙긋, 용화는 동생에게 미소 지으며 따뜻한 말을 건넸습니다. 어쩐지 독려가 섞인 것도 같은 용화의 말마디가, 저도 모르게 우울해진 이화의 감정을 보듬었습니다. 심지어 우쭐한 감정마저 들게 했죠. 이화는 언니의 말마디로부터 비롯된 들뜬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언니, 나 설이 키운 지도 7년이야. 이 정도면 베테랑 엄마지.”
“베테랑?”
“응. 베, 테, 랑.”
이화는 한 글자 한 글자를 강조하여 또박또박 발음해 보였습니다.
“……네가?”
우쭐하게 자랑해 보인 이화의 태도와는 달리, 용화의 반응은 시큰둥했지만요.
“반응이 왜 그래? 여기 나 말고 보호자가 더 있어?”
정말 섭섭하다 언니. 날 너무 못 미더워하는 거 아냐? 웬일로 칭찬해주나 싶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화는 툴툴거렸습니다. 그래, 자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용화는 지금과 같은 양상으로 이화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 마디를 뱉지 않고서도 이화의 화를 곧잘 북돋우는, 아주 신기한 재주를 말이죠. 이화는 잔뜩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용화를 노려보았습니다.
“내 동생이 워낙 허술한 사람이어야지.”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용화의 가벼운 웃음과 정곡을 찌르는 말마디뿐입니다. 그래도 질 수 없죠. 이화도 곧바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고 허술한 사람 아니거든?”
“난 멍청하다 한 적 없어.”
“언니 정말-!”
어떻게 하나를 안 져? 이화가 또다시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용화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말조심해, 나 좀 기분 나빠지려 하니까. 또한 입을 비죽이며 구시렁댔죠. 이거야 원, 서툰 구석은 모두 졸업한 것 같다는 말을 인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난감합니다. 역시 아직은 덜 자란 어른인 게 분명하리라고, 용화는 생각했습니다.
“네가 분유 온도 조절도 제대로 못 해서 허둥대던 게 아직도 선명해. 설이가 입천장 데서 세상이 무너져라 울던 것도.”
말이 나와서 하는 건데, 내가 여전히, 너보다 분유도 잘 태울걸? 용화는 짓궂게 이화를 놀렸습니다. 뭐, 처음으로 분유를 태우던 날을 떠올려보면, 용화가 이화보다 분유를 능숙히 태웠던 사실이 맞긴 했으니까요. 이화가 태운 분유를 입에 물자마자 빼액 하고 울어버리던, 성깔 있던 아기를 어찌 다룰 줄 몰라 당황하던 이화를, 용화가 진정시키기도 했으니까요. 첫 분유를 태우던 당시에는 용화의 압도적인 보살핌이 자리했습니다. 그 외에도 용화의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아 육아와의 전쟁을 무사히 치러 넘길 수 있었지만……. 더 나열하다가는 말이 사정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 설명은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죠.
아무튼 설이와 관련한 용화 자매의 사정이 그러했으니, 엄마 자격이 없다며 좌절하던 이화를 달래주던 기억이 용화에게는 선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니도 진짜……, 그게 언제적 얘기야.”
“얼마 안 됐어.”
“애기 분유 뗀 지도 한참이야.”
그래, 네 말이 맞다. 그 사이 베테랑 보호자가 다 된 모양이네 우리 이화. 용화는 이화를 살살 달랬습니다. 그러자 이화의 토라짐이 곧바로 풀렸죠. 정말 한결같이 똑같은 반응을 비추는 동생을 어떡해야 좋을지. 용화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화가 예전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면서요.
***
“이모.”
용화와 이화가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이, 설이는 친구와 함께 이모에게로 다가와 살포시 손끝을 잡았습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포근한 손길에, 용화는 자신의 아래편을 내려다봤습니다. 설이가 시선을 올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죠. 용화는 설이의 얌전한 부름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어머나, 예쁜 화환이네.”
“선물이야.”
설이의 양손에는 화환이 들려있습니다. 며칠 전, 이화와의 통화 너머로 들었던, 유치원에서 만들었다던 화환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화환을 자세히 살펴보니, 토끼풀과 그 꽃이 또한 드문드문 장식되어 있었죠.
“세상에, 설이가 이모한테 주는 거니?”
“응……. 유치원에서 만들었는데, 방금 장식을 좀 더 추가해봤어.”
이모 마음에 들면 좋겠어. 설이가 말했습니다. 정말 예쁘게 잘 만들었구나, 선물 고마워. 용화는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이가 만든 화환을 칭찬했습니다. 설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씰룩입니다. 양손으로 화환을 든 채로, 화환을 올렸다, 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요. 설이의 어색한 손동작을 눈치챈 용화는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설이에게 직접 화환을 씌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설이는 손에 든 화환을 용화의 머리 위에 살그머니 씌웠죠.
“생일 선물이 늦어서 미안해요.”
설이는 조금 기가 죽은 채로, 용화의 손을 붙잡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사과를 건넬 때면 존댓말을 붙이는 버릇이 오늘따라 더 귀엽게 다가옵니다.
“괜찮아, 생일 때 주지 못한 건 설이 잘못이 아니지. 이모가 바빠서 설이를 만나러 오지 못했잖아.”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 없단다. 용화는 조카의 볼을 살그머니 쓰다듬었습니다. 그러자 설이는, 용화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죠. 괜찮다고 해줘서 고마워 이모. 그 모습을 보며 용화는 또 한 번, 어릴 적 이화의 모습을 겹쳐봅니다. 무언가 잘못을 했을 때면 언제나 자기 목덜미를 그러안으며 사과를 건네던 어린 시절의 이화를요. 용화는 설이의 조그마한 등을 토닥였습니다. 이쯤 되니 이화가 제 아들을 다 키웠다며 한탄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용화는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설이와 몇 번 더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유치원에서 가장 큰 형님이 된 기분은 어떠하냐는 감상부터 시작해서, 유치원 생활은 재밌게 보내고 있느냐는 안부까지 물으면서요.
*
그러다 설이는 제 엄마에게로 쪼르르 다가가더니, 용화에게 건넸던 손짓을 마찬가지로 이화에게 건넵니다. 무릎을 굽혀달라는 요청도 함께 말이죠. 아들의 손짓을 재빠르게 눈치챈 이화는, 곧바로 설이의 시선을 맞추며 무릎을 굽혔습니다.
“이건 엄마 거야.”
설이의 한 손 위엔 토끼풀로 엮은 자그마한 팔찌가 있습니다. 토끼풀의 잎줄기로 이루어진 팔찌의 끈, 그리고 팔찌의 포인트로 추정되는 한 송이의 꽃, 또한 사이사이에는 클로버가 존재했습니다. 장식을 좀 더 자세히 살피니, 꽃 한 송이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네 잎 클로버가 장식되어 있고요. 설이가 방금까지 새봄이와 함께 열심히 찾아 헤매던 그 네 잎 클로버임이 분명했습니다.
“퇴원 선물.”
“이거……, 설이가 하려고 만든 거 아니니?”
설이가 가지고 싶어서 열심히 찾던 거잖아. 그러니 엄마한테 주지 말고 설이가 가지렴. 이화가 상냥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설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합니다. 내 건 새봄이가 만들어줬어. 이건 처음부터 엄마 주려고, 내가 새봄이한테 배워서 직접 만든 거야.
“그리고 네 잎 클로버를 가진 사람에게는 행운이 온대.”
그러다 갑작스레, 네 잎 클로버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이야기했죠. 설이는 이화의 손바닥 위에 팔찌를 올리더니, 자그마한 손바닥으로 엄마의 손을 꼭 감쌉니다. 이제 엄마가 더 슬플 일은 없을 거야. 엄마의 마음 한편에 쌓인 울적한 감정을, 갑작스레 위로하면서요.
“……엄만 슬프지 않은걸?”
“…….”
오늘 퇴원하는 기념으로 설이한테 이렇게 예쁜 네 잎 클로버도 선물 받고, 엄마는 행복한데? 살짝은 뜬금없이, 자신의 슬픔을 짚어 위로하는 설이에게, 이화가 내뱉는 말마디를 거짓으로 포장합니다. 설이는 손안의 네 잎 클로버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엄마의 시선을 응시하다, 다시 네 잎 클로버를 바라봅니다. 우물쭈물 망설이길 반복하다, 갑자기 큰 결심을 했다는 양 한마디를 뱉습니다.
“……거짓말…….”
병원 오고 나서부터는 엄마를 자주 보러올 수 없었으니까 잘 모르지만, 엄만 병원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매일 밤 울었어. 슬프지 않았다면, 엄마는 왜 매일 울었던 거야? 매일 밤 아빠랑 싸우고 나면 항상 울기만 했잖아. 설이는 바닥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이화를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우는, 거……, 저, 전부, 나 때문인 거, 알아…….”
말마디를 내뱉는 설이의 눈망울에 눈물방울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가 좀 더 행복했을지도 몰라. 내가 없으면, 엄마는 아빠랑 같이 살지 않아도 되잖아. 그럼 엄마가 훨씬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고작 일곱 살의 아이가 제 엄마의 입장을 선뜻 생각하며 자조 섞인 말마디를 뱉습니다. 충분히, 자기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할 법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곁에서 설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용화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말을 듣고 덜컥 눈물부터 쏟아내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용화는 곁의 동생을 바라봤죠. 하나 뜻밖에도, 이화는 비교적 덤덤한 표정을 하고 제 아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화도 그간의 정황을 차분하게 묘사하는 아이의 말마디에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을 피하지 않으며 차분하게 묘사하는 설이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좋을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그저 어떤 반응이 적절할지 몰라, 자꾸만 망설이며 아이를 흐리멍덩하게 바라볼 뿐이었죠.
내가 없으면 엄마가 행복해질 텐데……. 아이의 묵직한 말마디가 이화의 뒤숭숭한 상념을 휘어잡습니다. 마음은 더없이 쓰라립니다. 이화는 가슴께의 옷자락을 질기게 붙잡았습니다. 세상의 험한 심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인 줄만 알았는데, 너의 심정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가장 잘 달래줄 수 있는 사람은, 줄곧 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화는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있잖아, 엄마……. 나, 버리고 가면, 안 돼요……. 나, 나 버리, 고, 가지 마…….”
설이가 이화의 소매 끝을 붙잡으며 애걸했습니다. 후두둑, 굵다란 눈물방울이 아이의 발 앞으로 떨어집니다. 힘이 바짝 들어간 자그마한 손길로 엄마의 곁을 애절하게 갈구합니다. 이화는 설이가 움켜쥔 손길을 바라봤습니다. 난 정말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구나. 애달픈 손길을 바라보던 시선을 이내 바닥으로 떨굽니다. 제 엄마가 울어버리는 이유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아내는 설이의 태도가 더없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간의 불안한 심정을 제 어미에게 똑바로 말하기까지, 눈앞의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대체 몇 차례의 수많은 상상을 거쳐왔을까요. 벼랑 끝으로 내몰린 아들의 심정이 이화에게로 무척 안쓰럽게 다가왔습니다.
아들의 앞에서만큼은 울지 않겠다 다짐하며 버텨온 나날이었습니다. 아직은 어린아이니 제 엄마와 아빠 사이의 불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하며 버티고 넘겼습니다. 그러나 모조리 건방진 오만이었으며 부질없는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사이 엄마의 감정을 읽어낼 만큼 훌쩍 커버리고 만 건지. 아니, 어쩌면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이가 눈치챌 만큼 부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증거였을지도 모릅니다. 이화는 아이를 향한 배려가 부질없는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괴로워 좌절했습니다. 그래서 설이를 있는 힘껏 껴안고 말았죠. 아들의 조그마한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면서요.
“아냐, 아냐 설아. 엄마가 너를 왜 버려. 너 때문에 힘든 것도 아닌데…….”
포기하지 않고 변함없이 나만 바라봐주는 사랑스러운 아가를, 엄마가 어떻게 미워하겠어……. 이화의 어깨가 들썩입니다.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립니다. 설이를 향한 미안스러운 감정이 물밀듯 쏟아집니다. 그래서 이화는 설이를 더 세게 끌어안아 흐느꼈고, 설이는, 그렇게 울고 있는 엄마를 말없이 도닥입니다.
‘아빠와의 말다툼으로 네 잠을 깨웠던 사실을 몰라서 미안해. 부질없는 말다툼과 거북한 울음소리를 듣게 해서 미안해. 그 때문에 네가 엄마 걱정을 하게 만들어서, 널 버리고 떠나고 말 거란 불안감을 심어줘서, 엄마가 너무 부족한 엄마라서…….’
이화는 설이의 머리를 살그머니 쓸어내립니다.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오르는 말마디를 억지로 욱여 삼킵니다. 일곱 살의 아이에게 지우기엔 무겁기만 한 속생각을요. 이화는 설이를 말없이 고쳐 안으며, 아이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감싸 자그마한 머리를 토닥였습니다. 이화는 서툰 손길로 아이가 쏟아 뱉는 불안을 다급하게 위로했습니다. 자신을 끌어안으며 말없이 울고 있는 것을 눈치챈 설이는, 울고 있는 엄마를 조심스레 도닥입니다.
“아가.”
“…….”
“엄마한테……, 세상에서 제일 멋진 팔찌 선물해줘서 고마워?”
엄마가 상하지 않게 오래오래 보관해 둘게. 이화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그사이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설이를 바라봤습니다. 설이는 이화의 퉁퉁 부은 눈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눈가에 남은 눈물방울을 손끝으로 살그머니 닦아냅니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죠. 네 잎 클로버가, 엄마를 더 이상 슬프지 않게 해줄 거야.
유월, 어느 화창한 초여름의 날, 일곱 살의 아이가 엮은 네 잎 클로버의 팔찌는 아이에게, 그리고 아이의 엄마에게, 응어리진 불안을 다독이는 행운을 선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