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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후_사뽀

그날은 신라의 대명절과 같은 날이라 하였다.

시녀 언니들과 함께 그네를 타고, 부적을 만들고 춤을 추고… 정신없이 아침을 보낸 후, 창포주머니를 들고 뒷산에 오를 때였다. 언니들이 샘에 가기 전 창포물을 우려오겠다며 흩어지고, 시냇가에 가만 앉아있자니 좀이 쑤셔올 무렵. 뒤에 우거진 풀숲 속에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번화가와 가깝다 할지언정 이곳은 산속이었다. 이리 오래 걸릴 것이었으면 나도 따라갈걸, 뒷목을 타고 올라오는 서늘함에 짙은 후회를 느끼며 몸을 굳혔다. 산짐승일까? 이거 위험한 거 아냐? 도망가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다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들려온 것은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으로,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닌 중년여성의 탄식이었다.

 

“낭주께서 왜 이곳에…”

“……!”

 

놀라 고개를 돌아보자 풀 사이로 난 오솔길에 어딘가 익숙한 중년여성이 서 있었다. 저건…

 

“지후부인……?”

“예. 접니다.”

 

기묘한 일이군요, 이곳에서 낭주를 만나다니. 필경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는 곁으로 가도 되겠냐며 눈짓으로 물어왔다. 그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듯 앉은자리를 옆으로 옮기자 부인이 다가와 몸을 낮추었다. 둘 다 시냇가를 바라본 채 나란히 걸터앉아있자니, 시선을 옆으로 두기도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애꿎은 물만 바라보았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맑은 수면이 두 사람을 비추는 것이 어쩐지 껄끄러워 발끝으로 수면을 튕기자 물 위로 파문이 일었다. 슬쩍 돌아보니 지후부인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께서는 어쩌다 이곳에…”

“일 년 중 며칠 정도는 다른 사람들처럼 보내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같은 날 상전이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마음 편히 지낼 수도 없겠지요.”

 

답다면 다운 이유였다. 결국 한숨 돌리러 온 것은 같았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녀에게서 행복을 앗아간 그날 이후로, 아마도 늘 그랬으리라. 사람을 피해 찾아온 곳에서 또 나를 만났으니 이만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게 나은가, 눈치를 보고 있자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이곳에서 당신을 만난 것 또한 천운일지도 모르겠군요.”

 

놀란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혼잣말처럼 내뱉어본 말인 듯했다. 지친 얼굴로 명상이라도 하듯 입을 닫은 부인은 한 손으로 다른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독특하게 생긴 반지였다. 그래, 저것도 그녀의 버릇이었지. 문득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면 둘을 위해 마련된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쓸한 옆모습이 옷자락을 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자리를 고쳐 앉다 들고 온 창포주머니가 손에 만져지자 이거다 싶어 떠오르는 말들을 열심히 이어갔다. 오늘 창포물에 머리를 감았다느니, 이렇게까지 성대하게 보내는 건 처음이라느니, 아침에는 너무 힘들었다느니……. 부인은 나직이 웃으며 조금씩 반응을 해주었다. 저도 어렸을 때는 멋도 모르고 따라다니곤 했었지요. 본디 액운을 쫓아내는 의식이니 낭주께는 필요할지도 모르겠군요. 앞으로는 더워질 테니 그리 움직이기도 쉽지 않을 겝니다…. 처음에는 홀로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심기에 거슬리지는 않을지 긴장되고 민망하기도 했으나, 점점 따라붙는 대화에 흥이 올라 마치 정말 고모에게 얘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창포주머니가 펄럭, 하고 시냇가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

“낭주!”

 

그제야 부인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뻗은 손이 나의 팔을 잡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시내 위로 온전히 넘어갈 뻔한 상체가 단숨에 당겨져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꼴이 어떤지도 모르고 가까스로 봉변을 면한 나를 보는 지후부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위험하잖습니까!”

“가, 감사합니다…….”

“이것이 무어라고 몸을 던지십니까! 떨어지면 어찌 될 줄 알고요!”

 

그리 깊지는 않은 곳이라 과하다 싶은 면도 있었으나, 퍽 놀란 모습의 부인을 보자 변명이 쏙 들어갔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져 더욱이 별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며 몇 번이고 확인을 시켜주고 나서야 허리를 죄고 있던 억센 힘이 사라졌다. 팔뚝에도 빨갛게 쥔 자국이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스스로를 더 소중히 하십시오. 별것 아닌 일에도 경계를 늦추지 마시고요.”

 

깊은 한숨과 함께 떨어지는 부인의 말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있어 정말 별것 아니었노라 투정을 부릴 수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은 아직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너무 빤하게 바라본 탓일까, 지후부인도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처럼 재계를 하러 왔건만 다 흐트러지지 않았습니까.”

 

지후부인이 익숙하게 손을 뻗어, 익숙지 않은 손놀림으로 흐트러진 옷가지를 정리해주었다. 사라락.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옷을 매만지던 그가 돌연 굳은 듯 손을 멈추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티가 났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뗀 손이 얼음장과도 같았다. 부인의 눈에 찰나의 두려움이 지나갔다. 그 눈으로 나를 통해 보이는 누군가를 보는 듯했다.

존재해서는 아니 되는 딸에게 하는 듯한, 그런 손길에 나보다도 놀란 것은 그였다.

 

전보다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던 지후부인은 그 순간부터 뒤로 몸을 물리고 한기부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나눈 대화들은 모두 체면이 앞선 겉도는 말들뿐이었다. 부인이 왜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지, 알고 있기에 섭섭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단지 이 선을 넘게 해주지는 않겠구나 하는 체념이 따라붙었다. 그는 나를 맡아야 했다며 죄책감과 아쉬움이 담긴 말들을 곧잘 했지만 결국에는 혈육이라는 인식보다도 죄책감이 앞서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 점이 못내 아쉬워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한때 누군가의 대신이라도 그 공허함을 메워줄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허나 그럴 수조차 없음을 안다. 자식 잃은 어미에게 그 무엇이 위안이 되겠는가. 큰 빚을 진 오라버니의 유일한 핏줄, 홀로 살아남은 손녀딸.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는 없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던 무딘 손길이 자꾸 떠올랐다. 뒤따라온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도. 그녀에게는 딸이 없기에. 적어도 그리 행동해야만 했기에.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 채 얼마나 대화를 주고받았을까, 그가 슬슬 돌아가야겠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저도 언니들을 찾으러 가봐야겠어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일어서자 조심스럽게 다가온 지후부인이 옅게 웃어 보였다. 그는 세심한 손길로 옷깃을 정리해주고는 다시 물러났다. 더 이상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둘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긋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이리 있으니 당신이 저의 핏줄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군요. 낭주께서는 정말로… 오라비를 많이 닮으셨습니다.”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그를 만난 후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부인은 이미 산길 쪽으로 몸을 돌린 상태였다. 걸어가는 뒷모습이 당신다웠다.

 

―낭주가 함께 계신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그런 착각이 드는군요.

 

의심할 것만 같은 달콤한 속삭임 속에서 불현듯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에서 치는 종소리 같은, 혹은 방울을 치는 듯한,

탁. 탁. 탁. 탁. ……

멀어지는 시야 속에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날은 분명 남천성에 가기 훨씬 전이었을 텐데―

나는, 어째서 그녀를 알고 있는 거지?

 

생각이 미치자 화마가 덮친 듯 열이 올랐다.

아직 그리 더울 시기도 아니건만, 가슴 안쪽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발버둥을 쳤으나 의식은 열기 속으로 아득하니 사라져갔다.

 

-

 

“너도 참… 별나긴 하다. 요즘 단오를 누가 챙기냐?”

“아 그냥 같이 좀 가. 어차피 할 일 없다매.”

 

영 내키지 않는 태도의 친구에게 민속촌에 가보자는 얘기를 꺼낸 것은 별것 아닌 충동이었다. 평소 전통명절을 챙기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괜히 행사 핑계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야 할 것 같았다.

익숙지 않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사진을 찍어주는 도중,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 두리번거리다, 그 정체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끄는 곳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 햇살 아래 환하게 비친 머리칼에 녹음이 드리운 탓인지,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머리를 틀어 올린 단아하고 젊은 여인이었다. 기묘하게도 이 공간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손은 각각 개구져 보이는 남자아이와 어리광이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음에도 그저 한없이 행복하게만 보였다.

 

왜 이렇게 익숙할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여인의 틀어 올린 뒷머리가 바람에 풀려 이리저리 나부꼈다. 물기 어린 바람이 불어왔다. 기억보다 훨씬 어리고 젊은, 여전히 소탈해 보이지만 사랑을 아는 그 눈빛의 끝에, 그 들어 올린 시선 앞에 내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지어오는 작은 눈웃음에, 그에게 이어받은 것들이 한없이 밀려들어 온다.

 

나는 그를 잊어버렸음에도,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은 무의식중에 착실히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이 누구도 믿을 수 없을 때가 오면 모든 걸 포기하기 전, 한번은 나를 믿어보세요. 모두 끌고 간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늘 궁금했을 터인데 어째서 잊고 살았는지. 어떻게 잊고 지냈는지 모를 세월이 햇살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 재회한 가족과, 세월을 건너 가족이었을 사람과.

 

이 순간, 고양된 마음을 단 한 사람에게만은 들키지 않길 바라며.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의 그녀에게 마주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신념을 지켰노라고, 그 한마디가 전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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